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을 흔히 ‘청지기’라고 말한다. 청지기란 무엇인가. 자신의 신념과 생각을 관철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살피고 주인을 대신해 맡겨진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민의 표로 선출된 정치인은 시민 위에 군림하는 주인이 아니다. 시민으로부터 일정한 기간 권한을 위임받아 그 권한을 대신 행사하는 사람일 뿐이다.
물론 정치인은 자신의 신념을 가질 수 있다. 정치적 철학도 필요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정책을 추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과 주권자인 시민의 뜻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나는 그 답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청지기는 자신의 신념보다 주인의 뜻을 우선해야 한다.
정치인이 자신의 생각을 시민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이 충분한 판단과 의사 표현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냈는데도 정치인이 끝까지 자신의 신념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청지기의 자세라고 보기 어렵다.
민주주의의 출발점은 국민주권, 곧 시민이 주인이라는 데 있다. 시장은 시민의 표로 선출되지만, 그 표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시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이 맡긴 권한을 행사할 뿐이다. 시장의 권한은 시장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것이다.
정치인은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의 윤리를 설명하면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구분했다.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인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가가 단지 “나는 옳다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는 없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시민들이 무엇을 잃고, 어떤 고통을 겪으며,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이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책임윤리다.
지금 전남 국립의대 문제를 바라보는 목포와 전남 서남권 주민들의 심정이 그렇다. 국립의대 선정 과정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와 부실 심사 의혹은 단순한 행정 논란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목포를 비롯한 전남 서남권 주민들은 깊은 상실감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오랫동안 누적된 지역의 의료 현실이 있다. 의료 접근성이 부족한 전남 서남권 주민들에게 국립의대와 국립의대병원은 단순히 지역의 명예를 위한 사업이 아니다. 응급환자가 제때 치료받을 수 있는가. 중증환자가 먼 지역까지 이동하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는가. 지역 주민의 생명과 건강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의 문제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들의 요구와 우려가 커지고 있음에도 민형배 시장은 자신의 정치적 판단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시민들의 요구와 맞서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민형배 시장은 누구를 위해 그 자리에 있는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권한을 맡긴 시민을 위해서인가?
정치인의 가장 큰 위험은 자신이 시민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시민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믿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민의 뜻을 듣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려 하고, 시민의 요구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 할 때 정치인은 청지기에서 주인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다시 말한다. 민형배 시장은 주인이 아니다. 청지기다. 시민이 맡긴 권한을 가지고 시민을 위해 일하는 심부름꾼이다. 민형배 시장의 권한은 자신의 정치적 명성을 쌓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 시민에게서 빌려온 권한도 아니다. 시민을 위해 사용하라고 맡긴 권한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념과 시민의 뜻이 충돌할 때 정치인은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구의 뜻을 따르고 있는가? 내 생각인가? 아니면 나에게 권한을 맡긴 시민의 뜻인가?
정치인에게 소신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정치적 용기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는 데만 있지 않다. 때로는 자신이 믿어 온 생각을 내려놓는 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시민의 뜻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 “내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은 무엇을 원하는가?”를 다시 묻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 정치인에게 필요한 자세다.
지금 목포와 전남 서남권의 시민들은 말하고 있다. 국립의대와 국립의대병원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선정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