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희망을 말하는 기술이다. 정치인은 더 나은 내일을 약속하고, 그 희망으로 시민의 선택을 받는다. 그러나 희망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따라와야 할 책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말을 아낀다. 정치에서 희망은 표가 되지만, 책임은 표가 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이익이 다소 불공정하게 배분되는 상황도 참고 견딘다.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돌아올 손실이 불공정하게 배분된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강하게 저항한다.
지난 9일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브리핑룸에서 열린 전남 서남권 8개 자치단체의 ‘전남 국립의대 추천안 전면 재검토’ 공동입장문 발표를 지켜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역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지만, 어느 단체장도 자신이 속한 지역에 돌아올 수 있는 손실과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각자의 지역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단체장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선출된 정치인의 중요한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모든 책임을 정치인에게만 돌리는 것이 과연 옳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은 시민의 선택으로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결정의 결과에는 정치인의 판단뿐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고, 지켜보고, 때로는 침묵했던 우리 시민의 책임도 함께 담겨 있다.
더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잠시 빌려 쓰고 있는 땅이다.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었듯이, 우리 역시 머지않아 이 땅을 우리의 아이들과 손자·손녀,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결정은 오늘만의 결정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내리는 선택 하나하나가 미래 세대가 살아갈 지역의 모습과 삶의 질을 결정한다.
국립의대 문제도 결코 의과대학 하나와 대학병원 하나를 어디에 세우느냐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의료기관은 지역의 인구와 정주 여건을 좌우하고, 교육과 연구, 일자리와 산업을 연결하며, 지역에 사람과 자본이 머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다.
따라서 전남 국립의대 문제는 전남 서남권의 오늘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우리의 후손에게 어떤 지역을 물려줄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그래서 이제는 정치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책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언젠가 우리의 아이가 우리에게 묻는 날을 생각해 보자.
“아빠, 왜 우리 지역에는 큰 병원이 없어요?”
“왜 다른 지역에는 있는 좋은 의료시설과 사회적 자본이 우리 지역에는 부족한가요?”
그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때 정치인들이 잘못 결정했단다.”
그 말만으로 우리의 책임까지 사라질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단다. 우리 지역의 미래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관심을 가졌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했으며,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단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국립의대 문제를 특정 지역과 특정 지역의 대립으로만 바라봐서도 안 된다. 어느 지역이 더 많은 것을 가져가느냐의 문제를 넘어, 전남이라는 공동체 전체가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정치인은 희망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결국 시민이다.
오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다. 오늘 우리가 침묵하는 것 역시 하나의 결정이다. 그리고 그 선택과 결정은 언젠가 우리의 후손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서야 한다. 정치인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다. 훗날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그때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너희들의 미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단다.” 그 말을 할 수 있는 오늘을 만들기 위해, 지금 우리가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