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교육청이 긴급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재정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일반예비비를 사실상 예측 가능한 조직·정책사업에 대규모로 사용하면서 지방의회의 예산 심사권을 우회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전체 일반예비비 사용액의 90% 이상이 특정 정책사업 하나에 집중됐고, 그 사업에는 단순한 긴급 운영비뿐만 아니라 사무공간 공사와 장비 구입 등 상당 규모의 시설·자산 취득 비용까지 포함된 것으로 나타나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회 김건안 의원(민주·북구1)은 9일 교육청 2025회계연도 결산 및 예비비 지출 심사에서 전남교육청의 예비비 집행 실태를 지적하며 예산편성과 집행 절차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 의원에 따르면 전남교육청의 일반예비비 사용결정액은 총 16억7,196만7천 원, 실제 지출액은 15억2,611만3천 원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무려 15억3,616만1천 원이 ‘학교행정업무경감 지원체계 구축’이라는 하나의 사업에 두 차례에 걸쳐 결정됐다. 실제 지출액도 13억9,530만8천 원에 달했다. 전체 일반예비비 사용결정액의 91.9%, 지출액의 91.4%가 사실상 하나의 정책사업에 투입된 셈이다.
문제는 이 사업의 성격이다. 교육청은 지난해 6월 19일 해당 사업에 10억3,876만9천 원의 예비비 사용을 결정하고 7월 1일부터 지원체계를 시행했다. 이후 한 달여 만인 8월 1일 같은 사업을 위해 4억9,739만2천 원을 추가로 결정했다.
집행내역에는 운영비와 여비뿐만 아니라 사무공간 공사비와 장비 구입비 등 건설비·유형자산 취득비 8억916만5천 원까지 포함됐다. 예비비가 단순한 긴급 경비가 아니라 사실상 새로운 조직과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데 사용됐다는 의미다.
김 의원은 이를 두고 “재난이나 돌발사고가 아닌 교육청의 정책 결정에 따른 조직·지원체계 구축사업”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사무공간을 새로 만들고 장비까지 구입해야 할 정도로 사업 규모가 사전에 예측 가능했다면, 당초 본예산이나 추가경정예산에 반영해 지방의회가 사업의 필요성과 규모를 심사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한다는 것이 김 의원의 주장이다.
이번 논란의 본질은 단순히 예비비 사용액이 많다는 데 있지 않다. 예비비 제도는 본예산 편성 당시 예측하기 어려운 재정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장치다. 따라서 예비비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행정부가 새로운 사업을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다면 지방의회의 예산 심사권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업에 얼마의 세금을 사용할 것인지, 그 사업이 필요한지, 규모가 적정한지, 다른 사업보다 우선순위가 높은지 등을 주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사전에 검토하도록 하는 것이 지방재정의 기본적인 통제 장치다.
그런데 의회 심사를 받아야 할 성격의 사업을 본예산이나 추경에 편성하지 않고 예비비로 집행한다면 결과적으로 행정부가 의회의 사전 예산심사를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셈이 된다.
더욱이 이번 사업처럼 조직과 지원체계를 새롭게 구축하고 공간을 마련하며 장비까지 구입하는 사업이라면, 과연 이를 ‘예측하기 어려운 긴급한 재정수요’로 볼 수 있는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예비비 집행 과정에서도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됐다. 1차 사용결정액 가운데 1억3,202만7천 원이 남아 있었는데도 약 한 달 뒤 동일 사업에 4억9,739만2천 원의 예비비가 추가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1차 결정액의 12.7%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추가 예비비를 결정한 것은 최초 수요 산정이 적정했는지, 남은 예산을 왜 활용하지 못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예비비를 둘러싼 행정의 예측성과 관리 책임 문제와도 연결된다. 처음부터 사업 규모와 소요 예산을 충분히 검토했는지, 1차 예비비 결정 당시 향후 추가 소요까지 예상할 수 없었는지, 잔액을 활용하지 못한 불가피한 사유가 있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남교육청은 고교·대학 연계 학점인정 학교 밖 교육과정의 과목 개발에도 일반예비비 7천만 원을 결정하고 이 가운데 6,500만 원을 집행했다.
대학과 협의하고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사업이라면 상당 부분 사전에 계획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이를 예비비로 집행해야 할 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긴급한 사업이었는지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 의원은 추경이나 다음 연도 본예산에 편성하지 못한 구체적인 사유와 함께 실제 과목 개발 및 개설 성과를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학교 행정업무를 줄이겠다는 정책 자체의 필요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교사와 학교가 교육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행정업무를 줄이는 것은 중요한 정책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책의 필요성이 곧바로 예비비 사용의 적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책이 필요하다면 정상적인 예산편성 절차를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의회가 사업의 타당성과 예산 규모를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논란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비비 사용이 법적으로 가능한지 여부만 따져서는 충분하지 않다. 설령 개별적인 집행 행위가 형식적으로 허용되는 범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비비 제도의 취지와 지방의회 예산 심사제도의 목적에 부합했는지는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만약 예비비가 신규 정책이나 조직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하기 위한 사실상의 ‘우회 예산’으로 활용된다면, 의회 예산 심사제도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안은 단순히 지난해 예산 집행에 대한 지적에 그쳐서는 안 된다. 누가 어떤 판단으로 예비비 사용을 결정했는지, 당시 예비비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무엇이었는지, 본예산이나 추경으로 편성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책임 있는 설명이 필요하다.
또한 감사 등을 통해 예비비 사용의 적정성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부적정한 집행이 확인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책임 규명과 시정조치도 뒤따라야 한다.
아울러 향후에는 일반예비비를 사용할 때 ▲예측곤란성 ▲긴급성 ▲불가피성 등을 보다 엄격하게 판단할 수 있는 내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신규 조직 설치, 지속적인 정책사업, 시설공사, 장비 및 자산 취득 등 사전에 계획할 수 있는 사업에 대해서는 예비비 사용을 원칙적으로 엄격하게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예산 심사가 무력화되면 행정에 대한 신뢰도 무너진다. 지방의회의 예산 심사는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불필요한 절차가 아니다. 국민과 주민이 낸 세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주민의 대표기관이 사전에 심사하는 민주적 재정통제 장치다.
따라서 행정부가 예비비라는 제도를 이용해 의회의 사전 심사를 사실상 우회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이는 단순한 회계상의 문제가 아니라 지방자치의 기본적인 견제와 균형을 흔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앞으로 전남광주통합특별시가 출범하면서 광역 단위의 재정 규모와 정책사업이 더욱 커질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행정부의 예산 집행과 의회의 재정 통제 사이에 명확한 원칙을 세우는 일은 더욱 중요해진다.
예비비는 의회의 심사를 피하기 위한 비상구가 아니라, 정말 예측하지 못한 긴급한 재정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예외적 재원이어야 한다. 이번 전남교육청의 예비비 집행 논란은 바로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를 묻고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회가 이번 결산심사를 계기로 단순히 “잘못 사용했는가”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비비 사용 결정 과정의 적정성, 책임 소재, 재발 방지책까지 철저히 따져야 하는 이유다.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된 예산이 정상적인 심사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집행되는 일이 관행처럼 굳어진다면 의회의 예산 심사는 형식적인 절차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결국 예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지고 행정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번 사안은 15억 원이 넘는 예비비가 어디에 쓰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의회의 심사권과 행정부의 재정 집행 권한 사이에 세워진 원칙을 제대로 지켰느냐의 문제다.
그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통합특별시 출범을 앞둔 지방행정이 주민들에게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