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북부 사파에 사는 소수민족 아이들이 모여있는 운동장에서 필자가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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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뉴스는 지난 2018년 7월부터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베트남 엄마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을 한국 아빠들도 모르게 베트남 친정에 남겨두고 와서 베트남에 있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방치된 사건들을 추적했다.
이를 위해 본지는 지난 5년 중 코로나 기간인 2년 4개월을 제외하고 10번 이상 베트남을 방문해 실태를 추적했고, 이를 위해 베트남 남부 컨터와 석장시 그리고 까마우를 시작으로 중부 호치민과 무이네, 붕따우, 떠이닌, 다낭 그리고 북부 하노이와 박닌, 박장, 하롱베이, 하이퐁, 닌빈을 비롯 올해 5월에는 중국과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산간지대인 라오까이성 사파와 하장성 동반과 메오박 등을 돌면서 베트남의 아이들을 만났다.
▲ 사파에 사는 어린 소수민족 아이들이 밤 늦은 시간까지 관광객을 상대로 구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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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가 거듭되면서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베트남 아이들 중 소수민족 아이들 또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살고 있는 삶을 목격하게 됐다. 특히 베트남 민족의 다수를 차지하는 비엣족(베트남족) 아이들의 비해 소수민족 아이들은 교육은 물론이요 인간이 살기 위해 가장 기초적인 먹는 것 입는 것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관광객이 모이는 곳이면 밤 늦은 시간까지도 7~10살 정도의 어린 소수민족 아이들이 등에 자신들의 동생을 업고 관광객을 상대로 구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대한 관심 속에서 베트남 소수민족 아이들의 생활상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현재 54개 민족 중 90% 이상을 차지하는 비엣족(베트남)을 제외한 53개 소수민족이 해안선 길이만 3300km가 넘게 길게 늘어진 베트남 국토 북부에서 남부까지 곳곳에서 살고 있다. 특히 남부에 비해 북쪽은 고지가 높고 험한 산과 추운 날씨로 인해 베트남의 대표 작물인 벼농사는 볼 수가 없고,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밀이나 옥수수 등을 재배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필자는 먼저 아이들의 생활상을 보기 위해 소수민족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방문해 그들의 학교생활을 보도했다. 이후 소수민족 아이들이 사는 집을 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방문해서 어렵게 살아가는 소수민족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시리즈로 이번 취재를 기획했다.
▲ 사파 소수민족 3자매의 집에서 병이 들어 아무런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3자매 그리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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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에서는 코로나 이후 2년 4개월 만에 다시 찾은 베트남북부 라오까이성에 속한 1600M 고산지대인 사파의 소수민족 흐멍족 아이들을 소개한다. 본지는 지난 5월 베트남 사파를 방문 3명의 여자아이들이 병들어 아무런 경제활동을 하지 못한 아버지와 산 중턱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취재했다.
3명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산속에 있는 집까지 매일 4KM 산길을 오가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필자는 이들과 학교선생님들과 함께 아이들의 등굣길을 동행했고, 수업이 끝난 방과 후에는 3명의 여자아이들과 같은 흐멍족 소수민족 아이들 120명에게 바비큐 파티를 마련했다. 나의 어린 시절 넉넉치 못한 삶의 기억을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바비큐 파티를 마련했는데 다행히 사파의 소수민족 아이들이 바비큐를 앞에 두고 얼굴에 환하게 웃음꽃을 피우자 사파까지의 힘든 나의 여독이 풀렸다.
베트남 북부 사파를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한국의 잘 정비된 도로를 다녔던 필자에게는 새로운 경험이고, 고통이었다. 필자는 지난 5월 10일 인천공항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필자가 베트남을 갈 때 타는 비행기는 늘 저가항공이다. 항공료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서 조금이나마 더 소수민족 아이들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다.
▲ 베트남 사람들이 장거리 여행시 이용하는 슬리핑 버스 좌석에 필자가 누워있다. ©강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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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항공이라 좌석과 좌석 사이는 정말 협소했다. 물론 다른 서비스는 기대할 수가 없다 그저 4시간 30분 동안 몸을 움츠리고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베트남 사람들이 장거리를 갈 때 타는 슬리핑 버스를 타고 다시 5시간 30분을 가야만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사파에 도착할 수가 있다. 한국에서 아침 11시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서 타고 베트남을 향했지만, 실제 최종 목적지인 베트남 북부 사파에는 그곳 시간으로 밤 9시가 되어서 도착했다.
사파를 가는 도중 버스창밖으로 펼쳐진 베트남의 풍경은 베트남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제외하면 논과 밭에서 자라는 벼와 옥수수 등 식물들과 그리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의 모습은 우리의 70~80년대 농촌의 모습을 보는 착각을 들게 했다. 베트남 사람들의 정서도 우리와 비슷해서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마치 70~80년대 한국에 와 있는 느낌마저 든다.
사파는 인도차이나 최고봉인 판시판산(3,143M) 중턱 1600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어 열대의 나라 베트남에서 느낄 수 없는 온화한 기후로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 휴양지로 개발된 곳이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 프랑스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해 마치 유럽의 한 도시를 온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최근에는 베트남 중부도시 달랏에 이어 북부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알려지면서 세계에 많은 나라에서 관광객들이 사파를 찾고 있다.
▲ 프랑스식 아름다운 건물이 있는 사파의 아침 풍경 ©강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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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관광객이 몰리자 크고 작은 호텔들이 즐비하고, 여기에 소수민족들이 직접 운영하는 홈스테이까지 늘면서 하루 숙박비가 적게는 1만 5000원에서 보통 시설이 잘 갖추어진 호텔도 우리 돈 6~8만 원 정도면 아침식사까지 제공하는 등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파의 특징은 열대의 나라 베트남에서 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2월과 1월에는 베트남 다른 지역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눈이 내리고, 기온도 새벽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등 사실상 베트남에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실제 사파 로컬시장에서는 우리나라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배추와 무 그리고 열대과일이 아닌 사과와 배 자두 등을 팔고 있어 마치 우리의 전통시장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든다.
▲ 이른 아침 사파에 사는 소수민족 아낙네의 바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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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에 사는 소수민족들은 정말 부지런하다. 필자가 사파 도착 다음 날 이른 아침 호텔식당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이른 시간에 벌써부터 소수민족 여인이 대나무로 만든 큰 바구니를 등에 지고 바삐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의 소수민족 여인들은 어디를 가든 대나무 바구니를 등에 지고 다닌다. 그 속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자신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담거나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 등이 담겨져 있다.
길이 좁고 경사진 산길을 다녀야 하는 소수민족 여인들 입장에서는 대나무 바구니는 과거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이 길이 좋지 않은 들판이나 땔감을 나르기 위해 산길을 다니면서 지게를 지고 다녔던 것처럼 가장 편리한 운송수단인 것이다.
아침을 먹고 9시에 소수민족 교장선생과 통역을 담당한 영어선생 그리고 산속에 사는 소수민족 아이들인 3명의 자매들을 학교 근처서 만나서 아이들의 집을 산길을 타고 올랐다. 아이들의 집은 학교에서 2KM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산길을 가는 내내 숨이 차오르고 같이 동행한 선생들도 힘들어 하지만, 소수민족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서서 집을 향했다.
▲ 산 중턱에 있는 소수민족 3자매의 집이 위태롭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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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자로 벽을 만들고 스레트로 지붕을 삼은 소수민족 아이들의 집은 크기는 제법 컸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더구나 집안에는 빛이 들치지 않아 어두컴컴하고, 부엌과 침실이 차벽이 설치되지 않아 나무를 때서 밥을 짓는 이유로 검은 검댕이 집안 전체를 덮어있는 등 위생상태가 좋지 못했다.
설상가상 허술하게 만들어진 나무침대 위해 깔린 담요는 언제 세탁을 했는지 알 수 없이 시커멓게 때가 끼어있고, 날마다 밥을 지어서 먹는 밥그릇은 산에서 내려오는 흐르는 물을 아무런 정수과정이 없이 받아 놓은 고무다라이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베트남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그냥 마시면 탈이 날 수 가 있는 등 위험성이 있다.
▲ 침실 바로 옆에 소수민족 아이들이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주방이지만, 세간살이도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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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이런 환경에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지난 2년 4개월 전 이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들의 가정사를 들을 수 있었다. 4자매의 엄마는 수년 전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병이 들어 전혀 경제활동을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늙은 할머니와 살기 때문이다. 코로나 전 필자가 이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아이들의 할머니가 살아계셔서 아이들을 챙겼지만, 지난해 돌아가시면서 아이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 코로나 발생 전에 필자가 방문했을 때 할머니와 시집가기 전 큰 딸 등 4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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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들은 본래 3명이 아닌 4명의 자매였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시작되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생활이 더욱 궁핍해지자 올해 46살인 아버지가 2년 전에 당시 14살의 자신의 어린 큰 딸을 시집을 보낸 것이다. 이후 교장 선생님이 보내 온 사진에 작은 체구에 자신이 낳은 아이를 등에 업고 온 큰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면서 정말 안타까운 모습이 가슴을 저려왔다.
3명의 자년 중 가장 어린아이는 올해 10살이다. 2년 전에 내가 처음 이들을 만날 때 당시 8살의 어린 막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는 12살과 14살 이렇게 3명이 병이 들어 자신의 몸마저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빠와 살고 있다.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학용품이나 옷들이 아닌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쌀과 식료품들이었다.
급하게 쌀 50kg을 사 줄 것을 교장선생님께 부탁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만류를 한다. 쌀을 한 번에 많은 양을 사다 놓으면 쌀이 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 먹을 수 있을 만큼 양을 사주고 이들이 한 달 생활을 할 수 있는 생활비를 교장선생님에게 맡겼다. 아이들도 나를 두 번째 보는 것이라 나를 보면서 웃음을 보내왔다. 한국에 있는 12살 막내아들의 웃는 모습이 생각났다.
▲ 14살 어린나이에 시집을 간 소수민족 4자매의 큰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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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아빠를 보고 아이들 집을 나서려 하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이들 아빠가 남아있는 어린 딸들을 또 일찍 시집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3명의 여자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14살이란 어린 나이에 이미 시집을 보낸 큰 딸과 같은 운명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내가 아이들 아빠에게 제안을 했다. 만약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싶다고 하면 내가 보내 줄 테니 대신 아이들을 일찍 시집을 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이들 아빠도 그렇겠다고 나에게 약속을 했다. 아이들도 정말 기뻐했다. 나의 작은 역할이 아이들의 미래에 희망이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의 집을 나섰다.
아이들 집을 갈 때보다는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미끄러운 산길을 따라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내가 막내인 10살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랬더니 막내 아이가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내 손을 잡는다. 나하고는 두 번째 만남이라 아이들도 이제는 내가 낯설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소수민족 학교에서 필자를 위해 환영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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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도착하니 운동장에는 소수민족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명의 아이들이 단상에 오른다. 그리고 한 아이는 베트남어로 한 아이는 영어로 말을 한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나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교장선생이 나를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서 있는 운동장 속으로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에 둘려 쌓여 찍힌 사진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밝은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단상에 마련된 바비큐 파티가 시작됐다. 내가 도착하기 전 학교에서 음식점에 주문을 해서 120명의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차려졌다.
▲ 바비큐 파티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소수민족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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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교장선생님께 아이들을 위해 바비큐 파티를 해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나의 어린 시절 넉넉지 못한 살림에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자랐다. 그런 마음에 베트남 소수민족 아이들에게 뭔가 기억에 남을 파티를 해 주고 싶어 기획한 것이 바로 바비큐 파티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아이들이 정말 기뻐했다.
음식의 종류와 상차림은 학교 측에 맡겼다. 옹기종기 둘러않은 아이들 가운데는 노랗게 잘 익은 돼지바비큐와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 닭고기 그리고 우리의 메추라기 같은 작은새 요리 여기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시지와 탄산음료가 차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띠는 것은 바로 베트남 사람들이 명절에 먹는 형형색색으로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찹쌀밥이었다.
▲ 바비큐 앞에서 즐거워 하는 소수민족 아이들과 함께한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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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앞에 둔 소수민족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진다. 나도 어린아이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사직을 찍었다. 아이들이 서로 나와 함께 사직을 찍기 위해 나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쩝쩝거리며 먹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우리아이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볼 때 나도 모르게 행복해졌던 느낌을 타향만리 이곳 베트남에서 내가 다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